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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9. 9世 〉1. <요재공>통훈대부비안현감현주조공팽손사단비문(通訓大夫比安縣監玄洲趙公彭孫祀壇碑文)
1. 문헌 목록 〉9. 9世 〉3. <요재공>무공랑예문관봉교겸춘추관기사관공묘갈명병서(務功郎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公墓碣銘並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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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요재공>현주공휘팽손사단비문(玄洲公諱彭孫祀壇碑文)
玄洲公諱彭孫祀壇碑文 通訓大夫 庇安縣監 玄洲公 諱 彭孫은 淳昌(玉川)趙氏 始祖 高麗檢校大將軍 守門下侍中 諱璋의 九世孫으로 樂齋公后 玄洲公派의 派祖이시고 入寶城 通訓大夫 谷城縣監 陶庵公 諱纘의 先考이시다. 今般 玄洲公의 祀壇을 設壇케 된 것은 公의 막내아들 陶庵公諱纘께서 燕山朝 昏政時 막내 孫子 顯陵參奉 諱 由信을 데리고 南原에서 寶城두무실(杜門洞)로 隱居하신 후 後孫들이 壬辰 丙子의 兵亂을 겪으면서 公과 公의 先考 兩代의 墓所를 逸失하였는데 子孫들이 繁昌하여 民國五十年 一九六八年 戊申大同譜때부터 樂齋公后 進士公派를 判官公派, 玄洲公派, 苔溪公派, 宣傳公派로 分派하면서 公(諱彭孫)을 玄洲公派 派祖로 모시게 되므로서 公의 後孫에 世世傳承하여 入寶城 祖先으로 모셔 秋享墓祭를 奉祀하고 있는 甘井洞 先塋에 祀壇을 모시게 된 것이다. 宗史를 考究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近世以前의 歷史란 王室과 朝廷의 大小事와 國防外交를 中心으로 한 直接關聯된 사람들의 記錄에 不過하고 中央 및 地方의 官屬이나 儒林等에 關하여는 資料가 全無한 實情이기 때문에 歷史的 變革의 周邊人物에 對한 官邊史草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朝廷의 變故와 慘禍를 겪고 災難과 兵火를 當하면서도 文集을 남기고 祖先이 물려준 行狀 敎旨 官服 等을 所重히 간직하여 오늘에 이른 家門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러한 子孫들은 尊敬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렇듯 所重함을 알지 못하고 훼손 폐기 소각해 버리는 일이 吾門에서도 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吾宗祖先의 諱字가 史書 高麗史世家編과 高麗史節要에서 보이기는 世系四世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元吉과 五世 西州府使 諱 浣(冬暉) 等 여러분이 登場하시나 本貫의 表示는 高麗史人物編에 忠肅王때 文科에 及第하고 元나라 制科에 及第하여 密直副使를 歷任한 諱 廉(湖西派)에서 인바 始祖까지는 적어도 二百年 前後를 더 거슬러 올라가리라 推測되고 高麗中葉以來 守門下侍中平章事等 壁上功臣이 累代 輩出된 權門巨族으로 登場하고 있음을 볼때에 成族派別 門閥 家乘을 分明히 한 系圖가 있었을텐데 特히 李氏朝鮮 建國初인 太祖朝와 世祖 成宗 燕山朝間의 祖上의 文獻이 傳해 오고 있지 않으니 推考하기가 어려웠다. 靖難과 士禍로 수많은 宰臣이 被禍되어 어제의 功臣이 오늘의 역적이 된 時代에 해당하는 祖先의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現存 始譜가 肅宗二十八年(一七○二年) 各派의 家乘을 모아 만든 것이니 그 以前의 祖先에 對한 記錄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古今을 莫論하고 緣故 世居地를 옮겨 새 터전을 마련하는 데는 理由가 있기 마련임에도 吾宗 入寶城祖 谷城縣監 陶庵公 諱纘께서 季子 顯陵參奉 諱 由信을 데리고 南原에서 寶城杜門洞으로 옮겨와 隱居하시게 된 事緣을 正確히 밝힌 文證이 없다. 淳昌은 吾宗의 本鄉이요 南原 谷城은 世居地로 吾宗이 土斑閥族이었고 子女敎育과 社會的 進出이 有利하였을텐데 世居地와 先塋을 떠나 緣故가 없는 寶城山間으로 옮겨오신 그 事實 自體가 凡事가 아님은 分明하다. 또한 入寶城 陶庵公 諱 纘께서는 谷城縣監을 하셨고 公의 先考 玄洲公 諱 彭孫께서도 庇安(慶北 義城郡 庇安面)縣監을 하시었고 公의 祖이신 諱 時平께서는 東班内職인 司諫院 正言을 하시었는데도 先考와 祖의 墓에 表石을 하지 않았을 리 없는데 墓를 失傳하였다는 것은 理解가 되지 않아서 設壇碑成文 以前에 그 原因을 糾明하기 爲하여 歷史的 事件의 具體的 内容把握과 文獻의 綜合에 많은 時間이 要했다. 傳記는 主人公의 生卒 行狀 交友關係 時代相 그리고 主義思想 等을 正確히 理解한 後 記述하여야 하는데 具體的인 史料와 文證이 없는 幾百年前의 祖先에 對한 碑文을 쓴다는 것이 無理라는 것을 切感하면서도 充分치 못한 資料를 바탕으로 敢히 謹述할 수밖에 없었다. 爾後 더욱 正確한 史料와 考證으로 자랑스런 祖先의 遺事가 밝혀지기를 期待하면서 本碑文은 正史와 附屬資料(朝鮮科宦譜, 燃藜室記述, 湖南節義錄) 鄉土史(朝鮮湖南誌 및 關聯郡誌)와 先代의 碑文과 譜牒의 片鱗等을 綜合하여 推考할 수밖에 없었다. 本 碑文의 記述範圍를 世系 六世祖 諱 斐로부터 十四世 諱 廷義 廷美 廷元 廷顯의 九世代間을 設定한 것은 吾宗入寶城의 事緣을 考究하는데 玄洲公派祖 諱彭孫뿐만 아니라 公의 先代의 位相과 時代的 背景에 對한 理解가 必要했으며 一九八五年刊 乙丑譜때부터 玄洲公의 後孫들이 다시 分派하여 部將公(諱廷義)派 參議公(諱 廷美)派 梁山公(諱 廷元)派 察訪公(諱 廷顯)派의 四派로 나누어지고 있는 바 後孫들에게 그 世系와 源流를 밝혀주는 것이 宗史를 理解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判斷되었기 때문이다. 吾宗을 玉川趙氏라고 함은 四世祖 忠獻公 諱元吉께서 高麗 恭愍王朝 檢校門下侍中이요 鄭夢周 偰長壽 等과 함께 恭讓王을 擁立한 功으로 一等功臣이 되어 碧上功臣 三重大匡輔國光祿大夫 玉川府院君에 封해지셨고 淳昌의 古號가 玉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高麗때나 現今에서도 行政區域名이 淳昌郡이니 貫鄉을 古號 玉川보다는 淳昌으로 號稱하는 것이 좋겠다는 門中의 論議가 있어 或者의 混沌을 避하기 爲하여 玉川(淳昌)으로 併記케 된 것이다. 吾派는 玉川府院君 忠獻公 諱 元吉의 長子 世系五世 樂齋公 諱 瑛의 後裔다. 公은 麗末 書雲觀副正과 典工判書를 하셨는데 李朝太宗이 吏曹判書와 世子師傅를 命하였으나 高麗에서 벼슬한 사람으로 두 朝廷에서 벼슬할 수 없다 하여 나가지 않으셨다. 公은 李太祖(成桂)의 遷都를 도와준 舞鶴大師와 親交가 두터워 先考 忠獻公이 卒하시어 恭讓王이 禮官을 보내어 葬事할 때 大師가 公의 뜻을 물어 墓宅을 定하였다고 傳한다. 公은 동생 諱 瑜와 함께 高麗가 亡하자 淳昌에 隱居하여 朝鮮에 벼슬하지 않아 太宗으로부터 「父子三賢」이란 稱頌을 들었다. 玄洲公派는 樂齋公后 進士公派에서 分派되었는 바 進士公 諱 斐는 樂齋公 諱 瑛의 次子이시다. 世系六世祖 諱 斐는 兄 承義副尉 司正 諱 龜山과 함께 어려서 父親이 돌아가심에 麗朝 中顯大夫 典農副正을 하시고 太宗朝 漢城府尹의 屢徵에도 不就하신 叔父 虔谷公 諱瑜의 슬하에서 成長하여 二十才頃 太宗十七年(一四一七年) 生員 進士 兩試에 合格하였으나 先代의 遺恨을 生覺하여 進就하지 않으셨다. 配는 太宗朝 吏曹判書와 領議政을 지낸 清州人 韓尚敬의 外孫女요 吏曹正郎 全州人 崔進明의 女이시다. 諱 斐와 어린 時節 함께 成長한 四寸 諱 崇文께서는 世宗朝(一四一九∼一四五六年) 咸吉北道 兵馬節度使를 지내셨는데 아들 諱 哲山 兩代가 世祖朝 一四五六年 端宗復位 策謀로 妻姪 成三問等 死六臣과 함께 被禍되고 나이 어린 孫子 諱 瓊도 幸州로 귀양살이(謫居)를 갔으니 諱 斐도 無關하지 않았으리라 믿어진다. 諱 斐의 次子 世系 七世 諱 思履는 生員(朝鮮科宦譜 淳昌郡誌 司馬案)으로 配는 麗 末 大提學인 南原人 梁仲奎의 女이고 公의 弟 諱 明履와 四寸 諱 士敦은 正言을, 四寸 諱 士淳은 郡守를 하였는데 朝鮮湖南誌 文科 淳昌郡編에 成宗朝로 記錄되어 있는바 그때가 成宗朝初(一四六九年頃)로 推定되고, 世系 八世 諱 時若이 承政院 左承旨를 하셨는데 그때가 成宗十年(一四七九年)頃일 것으로 推定된다. 理由는 諱 時平의 從弟 諱 溥가 世宗朝 領議政인 翼成公 長水人 黃喜의 孫婿로 成宗朝 司憲府 持平과 牧使(長水黃氏 小尹公派族譜)를 하시었고 溥의 손위 同婿인 光州人 光山府院君 瑞石 金國光이 成宗初에 左議政을 하였으며 諱 時平의 堂姪 諱 九齡의 文科登第年度가 中宗十 一年(一五一六年)인바 世系와 寸數 및 出生序順으로 미루어 그러한 時期의 推定이 可能하기 때문이다. 世系 九世 通訓大夫 比安縣監 玄洲公 諱 彭孫은 諱 時平의 子로 玄洲公派의 派祖가 되시는 분인데 公의 遺事에 依하면 庇安縣監 到任 몇 달 만에 辭任하고 故鄉 南原鄉里에 돌아와 蓼溪(現 南原廣寒樓옆에 흐르는 河川)之東에 精舍를 짓고 뜰에다 梧桐나무 두 그루를 심어 二梧亭이라 이름하고 名儒들과 交遊하셨는데 그때가 成化末頃(一四八七年)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時期는 成宗朝末 또는 燕山朝初의 誤傳인 듯 하며 後孫(谷城縣監 陶庵公 諱纘)이 寶城杜門洞(現 寶城邑 朱峰里 北趙洞)으로 옮겨 살았는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의 兵火를 겪은 뒤 墓所와 文獻을 遺失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玄洲公의 從弟 諱 從孫의 墓碣銘에 依하면 世宗二十八年(一四四六年)生이고 成宗 二十三年(一四九二年) 泰仁縣監에 나아가 燕山昏政에 辭任하여 南原 朱村坊 金巖峰下 飛雁亭에서 從兄 玄洲公 彭孫과 蓼川之東에 精舍를 짓고 觴詠自娯하였으며 燕山五年(一四九九年)五十四歲로 吿終하셨다고 銘記되어 있는데 諱 彭孫 諱 從孫 從兄弟가 官職을 辭任한 時期가 燕山朝初 戊午士禍(一四九八年)때 士林派의 一員으로 罷職되신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또한 諱 從孫의 譜錄에 「墓가 허물어져(崩頹) 失傳되었다가 우연히 考墓下에서 誌石을 發見하여 封築하고 表石하였다」고 記錄된 點에서 看過할 수 없는 重要한 암시를 받게 된다. 即 「어떤 事緣이 있어 墓를 허물고 碑石을 묻어 누구의 墓라는 것을 모르도록 하였는데 後孫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發見하게 된 것」으로 判斷되어 「甲子士禍(一五○四年)때 剖棺斬屍를 피하기 爲하여 일부러 墓를 허물고 碑石을 묻었을 것」으로 推考를 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八世 諱 時平은 成宗中期 司諫院 正言으로 王妃 尹氏를 廢할때 王의 諮問에 應하였고 九世 諱 彭孫은 燕山朝 戊午士禍때 士林派로 勳 舊派에 依해 罷職되었으며 燕山朝末頃 谷城縣監이셨던 十世 諱 纘과 顯陵參奉이었던 十一世 諱 由信께서 燕山君의 母 成宗妃 尹氏 廢妃關聯 先代 成宗朝 臣下의 八寸까지 慘刑하는 甲子士禍를 當하여 祖先兩代와 後孫의 被禍가 두려워 墓를 허물고 表石을 땅에 묻고 寶城山間으로 避世하셨던 것으로 判斷된다. 成宗朝때 士林派가 中央에 많이 登用되어 金宗直을 中心으로 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에서 勢力을 갖게 되었는데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從來의 閥族인 柳子光等 勳舊派와 反目이 심하여 오다가 燕山朝四年(一四九八年) 成宗實錄의 한 史草에 金宗直의 吊儀祭文이 世祖가 端宗으로부터 王位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여 이를 問題삼아 柳子光等이 선비를 싫어하는 燕山君에게 吿해 받혀 이미 죽은 金宗直을 剖棺斬屍하는 등 많은 선비를 죽이고 귀양 보내고 파면하였으며(戊午士禍) 燕山君 生母 成宗妃 尹氏는 질투가 심하여 王妃의 체모에 벗어난 行動을 많이 하여 成宗十年(一四七九年) 廢妃되었다가 다음 해에 死藥을 받아 죽었는데 燕山君이 어머니(尹氏)를 復位하여 成宗朝에 配祀코자 할 때 이에 反對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廢妃 尹氏가 死藥을 받을 때 三歲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林士洪의 밀고로 알게 된 燕山君이 廢妃 尹氏 關聯 成宗朝 옛 臣下들의 八寸까지 부관참시하거나 사형 귀양 파면한 甲子士禍(燕山十年 一五○四年)가 있었으니 成宗朝 司諫院 正言을 하신 諱 時平의 直系와 兄弟들이 被禍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와 같은 史實로 보아 諱 從孫의 허물어진 墓와 땅에 묻힌 表石을 理解하게 되고 諱 時平과 諱 彭孫 兩代의 墓 失傳의 理由도 알게 되고 諱 纘과 諱 由信께서 寶城으로 隱世 하신 事緣도 理解된다. 譜錄에 玄洲公 諱 彭孫의 子 三兄弟中 長子 諱綅 二子 諱綉 兄弟가 後嗣가 없는 것으로 보아 被禍되어 絶孫되지 않았나 의심을 갖게 하고 諱 時平의 從弟 諱 時均과 從姪 三名(諱 禧厚, 士忠, 士傑) 等이 絶孫으로 無后하니 그 緣由 궁금하기 짝이 없다. 向後 더욱 考究되어야 할 것이다. 諱 時平의 姪女婿 新平人 宋泰가 吏曹判書요 外孫 宋純이 中宗朝 左贊成이었고 諱 彭孫의 孫 諱 由信의 丈人인 麗山人 宋仲儒가 成宗朝 縣監이오 妻祖父 忠剛公 宋侃이 端宗節臣이었으니 姻戚의 史錄이나 譜錄等을 通하여서라도 事緣들이 밝혀지기를 期待 한다. 世系十世 通訓大夫 陶庵公 諱纘은 玄洲公 諱彭孫의 季子로 入寶城祖이시다. 生卒과 登科年代를 알 수 없다. 朝鮮科宦譜에 武科及第로 郡守를 지냈고 崇文(端宗節臣)의 從孫으로 記載되어 있는데 谷城縣監을 그만두신 時期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八寶城年代는 燕山朝 甲子士禍(一五○四年) 即後로 斷定하여드 좋을 것 같다. 十一世 顯陵參奉 諱 由信은 諱 續의 季子로 燕山朝七年(一五○一年) 參奉을 하셨는 데 先考와 함께 入寶城杜門洞하셨다. 寶城으로 옮겨 온 것이 諱 由信의 丈人 礪山人宋仲儒가 縣監으로 있어서라고 하나 寶城郡鄉土史 歷代郡守案에서 確認되지 않고 朝鮮 湖南誌 武科 高興郡編에 成宗朝 縣監이라고 登載되어 있다. 옛날 名儒들이 어지러운 世上을 避하여 깊은 山間에 隱遁生活을 한 例는 많고 隱居하신 마을을 杜門洞이라 하였는바 寶城 두무실은 吾宗 入寶城 先祖께서 隱居하셨기 때문에 일컬어진 마을이름일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의 北趙洞이다. 吾祖先은 燕山君의 廢位로 隱遁生活을 免한 듯하다. 燕山君은 在位十二年인 一五○六年 中宗反正으로 강화도 喬桐에 安置되었는데 戊午士禍 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를 죽이고 經筵과 大提學을 폐하였으며 司諫院을 폐하고 成均館을 폐하여 오락장소를 만들고 美女를 끌어들여 유희와 安樂으로 세월을 보내며 國政을 度外視하자 폭정에 시달린 百姓들의 원성이 높아져 燕山君의 비위를 거슬려 罷職되었던 前吏曹參判 成希顔 知中樞府事 朴元宗 吏曹判書 柳順汀과 湖南地方의 柳濱 季顒 等이 成宗의 二子 晋城大君을 中宗으로 推戴한 것이다. 宗族인 諱 珣은 中宗二年에 武科하고 珣의 동생 諱 琛은 中宗九年에 文科로 吏曹佐郎 弘文館應敎 成均館大司成을 하시고 公의 아들 諱 義貞은 中宗第九女 孝靜翁主를 配로 맞은 淳原尉이다. 諱 彭孫 玄洲公의 三從인 九齡은 漢陽人 靜菴 趙光祖와 같이 性理學의 大家 金宏弼의 弟子인데 中宗十一年(一五一六年) 文登科하여 藝文館奉敎兼 春秋館記事官을 하였고 中宗十四年(一五一九年) 己卯士禍때 大司憲 趙光祖 藝文館 應敎 奇遵等 新進改革派를 南袞 洪景舟等 保守派가 奸計를 꾸며 「走肖의 무리가 나라를 마음대로 함에 사람들이 모두 칭찬한다」고 퍼뜨린 뒤 王의 密敎를 받아 朝廷의 論議없이 打倒하려 할 때 「우리 藝文館이 罷職되었다 하더라도 오래 侍從으로 있었는데 어떻게 晏然히 물러가겠습니까. 이 자리에 史筆을 잡을 사람이 없으니 國家大事가 흐지부지하게 되어 傳할길이 없어 더욱 민망스럽습니다.」고 領相 鄭光弼에게 諫하여 드디어 奉敎 趙九齡과 檢閲 蔡世英 權輗가 史筆을 잡고 그 일을 記錄하였고 禁府를 시켜 推問하여 罪의 輕重을 가리게 하였다. (燃藜實記述 第七卷) 諱 彭孫의 内當姪 新平人 宋純이 中宗十四年 文科하여 벼슬이 左贊成에 이르렀다. 世系十二世(玄洲公 四世孫) 通訓大夫 清菴公 諱 之漢께서는 吾宗 入寶城後의 出生 一世代로 寶城杜門洞에서 出生하셨는바 中宗三十二年 丁酉(一五三七年) 武科及第하여 海南縣監을 하셨으며 治政에 德義를 베풀어 郡南에 善政清白銅碑를 세워 칭송하였다고 하며 配는 珍原人 生員 朴胤原의 女와 南陽人 持平 洪維戒의 女이시다. 지금의 甘井洞 先塋은 公이 致誠으로 마련하여 入寶城 祖考 兩代를 封葬하였다고 한다. 世系十三世(玄洲公 五世孫) 諱 瓘은 海南縣監 諱 之漢의 長子로 宣祖五年壬申(一五七二年) 武登科하여 忠毅校尉 判正으로 兵曹佐郎에 이르고 兵曹參判을 贈職받으셨다. 諱 之漢의 二子 諱 琪는 壬辰倭亂때 모든 文籍이 불타고 經典이 남아있는 게 없어 亂後에 七書를 외워 傳하여 版册케 하신 분으로 朝散大夫 軍資監 僉正을 하시었다. 世系十四世(玄洲公 六世孫) 釜谷公 諱 廷義는 諱 瓘의 長子로 宣祖一年 戊辰(一五六八年) 武科及第로 進勇校尉 義興衛의 部將을 하시고 丁酉再亂(一五九七年)때 殉死하셨다. 義興衛는 五衛의 하나로 中左右 前後의 五部로 나누어 重要地에 駐屯하였는데 壬辰亂後 軍制가 무너졌는바 諱 廷義께서는 어느 部에 屬하셨는지 記錄이 없으나 壬辰年 六月 임금을 義州로 모시고 가던 宣傳官 順興人 安弘國이 三南地方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中途에 王命을 各部隊에 傳하고 寶城을 지키기 爲하여 郡守가 된 安公의 副 將으로 故鄉에 오셔 義軍을 倡起하고 湖嶺間을 두루 다니면서 戰鬪하여 많은 賊을 斬殺하셨다. 安公은 李舜臣將軍의 代理도 보고 先鋒將도 되어 크게 功을 세웠다. 丁酉年二月 元均이 李舜臣을 代身한 후 安公이 中軍將으로 昇進되어 丁酉再亂때 戰艦 三十餘척을 거느리고 敵陣에 돌격하여 도망가는 敵을 추격하다 安骨浦(慶南 昌原郡 熊東面의 浦口)에 이르러 安公이 戰死하자 公은 軍의 士氣가 沮喪될까 염려하여 發喪을 아니하고 軍事를 代攝하여 바다에 가득한 敵의 함대를 섬멸한 後 安公의 屍身을 거두어 龍仁에 護送하고 安公의 殉國을 세상에 알리었다. 公이 아니었으면 安骨浦의 大勝을 거두지 못하였을 것이고 安公의 殉國 또한 빛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安公死後 公은 義兵을 거느리고 全北 南原郡 雲峰에 이르러 漢陽人 山西 趙慶男과 더불어 合兵討賊하다가 丁酉八月 南原 陷落時 衆寡不敵으로 殉節하시었다. (湖南節義錄 韓國史大系 國史大事典) 後嗣에 雲龍 季龍 二子를 두었으니 玄洲公后 部將公派가 公의 後孫이다. 諱 瓘의 二子 美庵公 諱 廷美는 寶城杜門洞에서 낳으셔서 蘆洞錦湖代如村으로 옮기셨다가 擧石里로 移居하셨는데 天稟이 純厚하고 어려서 英特하였는 바 叔父 僉正公 諱琪에게서 修學하여 蔭仕로 同知中樞府事를 하셨는데 丁酉再亂때 兄 釜谷公(廷義)의 戰歿을 當한 後 先代의 家訓을 이어 林泉에 늙으셨는데 户曹參議를 贈職(朝鮮科宦譜)받으셨다. 後嗣에 鳴國 弘國 昌國 三子를 두시었고 그 後孫이 玄洲公后 參議公 派이다. 諱 瓘의 三子 諱 廷式은 武科及第하여 禦侮將軍 訓練判官을 하였는데 後嗣에 擎國, 興國, 忠國 三子와 孫子가 있었으나 絶孫되어 公의 遺事를 알 수 없음이 아쉬운 일이다. 다만 朝鮮湖南誌 武科 寶城編에서 諱字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朝散大夫 軍資監僉正 諱 琪의 長子 諱 廷喆은 後嗣가 없어 生卒年代와 遺事가 無傳하고 二子 諱 廷元은 光海四年 登武科하여 朝廷에 벼슬하다가 當時 光海君 推戴의 功臣으로 實權者였던 禮曹判書와 大提學을 兼任함 李爾瞻이 朝廷에 黨派를 만들어 禍를 꾸며 臨海君과 永昌大君을 죽이고 宣祖의 丈人 金悌男을 죽이는 등 個人感情으로 큰 獄事를 일으킬 때 公의 재주와 行實을 듣고 함께 圖謀하기를 要求하였으나 公은 남에게 恩惠를 베풀고자 慶南 梁山郡守로 내려가셨다가 李의 殺生廢置가 너무 甚함에 官職을 辭退하고 故鄉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셨다. (朝鮮科宦譜 國史大事典, 譜錄) 슬하에 아들이 없어 동생 廷亨의 아들 振玉을 養子했는데 뒤에 振國 相玉 振夏 振壁 昌玉 五子를 낳으셨으니 그 後孫이 玄洲公后 梁山公派이다. 諱 琪의 三子 諱 廷亨은 天性이 慷慨하고 志略이 뛰어났는데 丙子胡亂(仁祖十四年 一六三六年)때 아우 廷顯과 더불어 竹山人 牛山 安邦俊을 따라 擧義하여 礪山에 이르렀다가 和義가 成立됨에 痛哭하고 돌아왔다. (湖南節義錄) 後嗣로 長子 振玉은 兄에게 系出시키고 振熙 振徽 振憲 三子를 두었으나 無后로 絶孫되었다. 諱 琪의 三子 諱 廷顯은 才器가 宏博하였는바 武科에 登科(朝鮮湖南誌)하여 지금의 江原道 旌善인 桃源道察訪을 하였는데 丙子胡亂때 故鄉으로 돌아와 安邦俊을 따라 兄 廷亨과 더불어 倡義하여 礪山에 이르렀다가 和議가 成立됨에 痛哭하고 돌아왔다.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돌아가심에 通訓大夫 掌樂院 正을 贈職받으셨다. (湖南節義錄) 後嗣에 振瑀, 振海 二子를 두시었고 그 後孫이 玄洲公后 察訪公派이다. 以後 世世 後孫들의 繁昌과 榮達은 省略하거니와 入寶城 吾宗의 玄洲公派 世居遺事와 그 支流 四派의 源流까지만을 살펴보았다. 玄洲公 諱 彭孫을 派祖로 모시게 된 것은 三十年前의 일이나 公은 燕山昏政으로 後孫이 멀리 떠나고 世代가 지나감에 後孫들의 秋享墓祭를 받지 못하신지 幾百年이 된 일이다. 公이 時流를 恨하시면서 觴詠自娯하시든 時節이 五百年이나 지난 오늘 南原 蓼川은 아니더라도 後孫들이 世居隆承하는 寶城江上流 蘆洞甘井기슭 宗山에 魂魄이 便이 쉬시도록 祀壇을 모셨으니 이제야 後孫들의 마음도 平安을 얻은 셈이다. 公이 南原 蓼溪之東 飛雁亭에 二梧亭을 築成하여 末年을 生居하셨고 飛雁含蘆의 名穴이 있는 蘆洞에 死居하심은 奇緣이 아닐 수 없다. 기러기 훨훨 날으는 飛雁亭에 살으셨다가 기러기 힘차게 떠나가는 形局의 땅에 잠드셨으니 말이다. 甘井洞 先塋은 吾派 至誠奉享의 聖域이며 永遠한 報本의 求心處이다. 派祖 玄洲公 諱 彭孫과 公의 考 諱時平의 祀壇을 더 늦지 않게 設壇할 수 있었음은 全宗人의 合心된 崇祖爲先의 精神이 바탕되었으나 全的으로 京畿道 坡州所在 凡一金庫(株) 社長인 在京 玄洲公派宗親會長 邦基 宗의 基金奉獻으로 可能하였다. 巨金의 奉獻과 격려로 오늘이 있게 되었음을 特記한다. 따라서 族丈 東旭 良勳 化翼翁과 仝基 啓英 宗의 勞苦 至大하였으며 設壇門事의 始末을 計劃하고 監督執行하신 良勳翁의 獻身的 奉仕는 稱頌받아 마땅하고 僉宗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崇祖爲先함은 祖上의 遺志받들고 蔭德을 기리는 뜻과 子子孫孫의 發展을 祈願하고 後孫에 귀감되기를 바라는 自身들의 道德心宣揚이다. 本 小考를 쓰게 된 動機는 玄洲公 祀壇碑文을 論證하고 詳述하려는 의도였으나 워낙 宗史에 밝지 못하고 時間 또한 促迫하였을 뿐만 아니라 考究에 必要한 關聯資料도 充分히 入手치 못하여 훌륭한 祖上들의 遺事를 오히려 잘못 밝히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움 없지 않다. 미흡한 점에 對하여는 앞으로 뜻있는 宗人의 자문을 받아 補完되고 바로 잡아지게 되기를 期待하면서 아쉬웁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拙稿를 끝맺는다. 檀紀四三二二年五月六日(陰四月二日) 西紀一九八九年五月六日 十八世孫 啓賢
 
1. 문헌 목록 〉9. 9世 〉1. <요재공>통훈대부비안현감현주조공팽손사단비문(通訓大夫比安縣監玄洲趙公彭孫祀壇碑文)
1. 문헌 목록 〉9. 9世 〉3. <요재공>무공랑예문관봉교겸춘추관기사관공묘갈명병서(務功郎藝文館奉敎兼春秋館記事官公墓碣銘並序)